문학

동백의 섬 내도에 들어가면

트래블노마드 2017. 7. 19. 09:30

동백의 섬 내도에 들어가면(1)

고운 최치선​



동백의 섬 내도에 들어가면 취한 듯 홀린 듯 몸 따로 마음 따로 유체이탈이 된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낙화한 동백은 스스로 무수히 많은 길을 내고
표지판도 속도제한도 없는 그 길 위에 서면 누구나 무중력의 상태로 황홀경에 빠진다
붉은 심장 같은 꽃덩이 가장 향이 짙을 때 세상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자연의 이치를
동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리도 아름답게 보여준다

생애 처음으로 피보다 더 붉은 동백꽃 길을 걸어보니 발 밑 우주가 온통 불타고 있어
유언처럼 땅에 새겨진 붉은 꽃덩이들 그대로 쿵쾅쿵쾅 뛰고 있는 심장이 된다
적멸보궁이 따로 있을까
자신의 심장을 던져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고 죄 많은 육신으로 하여 순간의 부처를 만나게 한다
한 번 내도에 들어오면 바람마저 그 길을 비껴가긴 어려운 일
내가 버린 딱딱한 욕망 저기 동백꽃길 위에 떨어져 불타고
춘백과 홍백으로 아름답다 말하기 어려워 조용히 내 심장 내려 놓는다




동백의 섬 내도에 들어가면(2)

고운 최치선



동백의 섬 내도에 들어가면 봄의 중심 한 가운데로 붉은 향을 뿜어내며 떨어지는 꽃비를 보게 된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남루한 육신들을 위해 눈부시게 빛나는 심장의 언어로 유적이 되는 꽃덩이다
봄의 개화를 위해 목숨 끊어 길을 내고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발화해 빛나는 사랑을 완성하는
그게 바로 내 사랑이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소멸하는 동백의 심장은 전 생애를 바친 그리움이 된다
이 세상 모든 기호와 감탄사를 동원해도 채울 수 없는 붉은 기운은 내 눈을 멀게하고
허공에 뿌려진 붉은 피는 그대로 봄볕처럼 부드럽게 내 정수리에 스며든다
바위틈과 틈 사이에 피어있는 잔설 위 사랑의 부호처럼 떨어진 붉은 동백 한 송이
바다를 눈앞에 두고 장엄한 풍경을 만든다
단 한 번도 자신이 태어난 나무에 오르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처연히 단호히
떨어지는 수십 수백 수천의 동백 꽃 무리들은 붉은 언어의 파편들이다
붉은 꽃방석이 수없이 놓여있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수백의 동박새 울음소리 파르르 떨리고
수많은 발자국을 뒤덮은 저 핏빛 동백꽃향기로 내도의 사방이 뼛속까지 붉게 물든다